유 보현 목사
며칠 후, 1월 3일이면 양평에 내려 온지 29년으로 접어듭니다.
그 사이, 팔팔하던 몸도 마음도 칠십 초로의 몸과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노령화, 노인의 이해, 노인복지의 관점이 ‘보호자의 측면’이었다면, 이제는 제 자신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느끼는, 진정한 의미의 늙는다는 것, 노인을 이해한다는 것,
노인에게 바람직한 노인복지의 보다 실제적인 주요관점 등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강에 변화가 왔습니다.
우선, 체력이 저하되니 할 수 없어진 일이 많아졌습니다.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조력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듦을 잊고 무리를 하다가 곤란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얻은 지혜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의 나’에 익숙해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노인이 ‘아직 할 수 있다’고 고집하셔서 젊은 사람들을 걱정케 하시는 일이 ‘당신의 나이 듦의 변화를 잊은’ 것일 뿐, 자존심이나
문제성 고집은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왔습니다.
무슨 일을 판단하고 추진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이제는 실수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라는 생각이 들어 신중해진 점도 있으나 간단명료한 일에도 판단과 결정에 담대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묻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새로운 생활 이기의 활용과 정보를 뇌에 입력하여 필요할 때 요긴히 꺼내 쓰는 것이 맘 먹은대로 쉬이 되지 않습니다.
노인과의 대화는 말 나눔 이상의 의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 차려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 더 집중하게 되고 메모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노인과의 대화는 재촉하지 않으며, 조금 기다려 들어야 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과분한 칭찬을 들어도 금방 잊고 무덤덤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듣기 좋은 한마디 말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마디 말이라도 기분 좋아지실 말씀을 나누어야 했었다고 깨닫습니다.
이젠, 보호자의 입장이 아니라 ‘노인 자신“의 입장에서 정말 ’노인 이 바라시는 일‘이 무언지 알고 조금은 더 한편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알음은 항상 뒤늦게, 西山 우둠지에 해 걸린 석양에야 아쉬움으로 깨닫는 것일까요?
유 보현 목사
며칠 후, 1월 3일이면 양평에 내려 온지 29년으로 접어듭니다.
그 사이, 팔팔하던 몸도 마음도 칠십 초로의 몸과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노령화, 노인의 이해, 노인복지의 관점이 ‘보호자의 측면’이었다면, 이제는 제 자신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느끼는, 진정한 의미의 늙는다는 것, 노인을 이해한다는 것,
노인에게 바람직한 노인복지의 보다 실제적인 주요관점 등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강에 변화가 왔습니다.
우선, 체력이 저하되니 할 수 없어진 일이 많아졌습니다.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조력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듦을 잊고 무리를 하다가 곤란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얻은 지혜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의 나’에 익숙해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노인이 ‘아직 할 수 있다’고 고집하셔서 젊은 사람들을 걱정케 하시는 일이 ‘당신의 나이 듦의 변화를 잊은’ 것일 뿐, 자존심이나
문제성 고집은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왔습니다.
무슨 일을 판단하고 추진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이제는 실수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라는 생각이 들어 신중해진 점도 있으나 간단명료한 일에도 판단과 결정에 담대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묻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새로운 생활 이기의 활용과 정보를 뇌에 입력하여 필요할 때 요긴히 꺼내 쓰는 것이 맘 먹은대로 쉬이 되지 않습니다.
노인과의 대화는 말 나눔 이상의 의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 차려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 더 집중하게 되고 메모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노인과의 대화는 재촉하지 않으며, 조금 기다려 들어야 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과분한 칭찬을 들어도 금방 잊고 무덤덤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듣기 좋은 한마디 말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마디 말이라도 기분 좋아지실 말씀을 나누어야 했었다고 깨닫습니다.
이젠, 보호자의 입장이 아니라 ‘노인 자신“의 입장에서 정말 ’노인 이 바라시는 일‘이 무언지 알고 조금은 더 한편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알음은 항상 뒤늦게, 西山 우둠지에 해 걸린 석양에야 아쉬움으로 깨닫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