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3) 유 보현 목사
양평 내려와 노인의 가정, 가장이 된지 29년쨉니다. 40대 초반, 쨍쨍하던 때 내려와 70대 초로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모든 게 변했는데 사람들은 내게 말합니다.
“목사님은 예전 그대로시네. ”칭찬일까요? 답답함 일까요? 흉보는 걸까요?
세상과 세태가 변하고 사회도 제도도 변했는데 저는 오늘도 원장 전도사님에게서 “하여튼 . . . 여전하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양원 남자 어르신들은 서로 잘 지내시다가도 순식간에 맞붙어 싸우실 때가 있습니다.
예측이 불가하고 교육이 불가하고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금방 잊어버리시고 함께
다시 친구가 되시니 보호자들께 “일어난 일”의 경위를 전화로 설명드리지만 “다신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는
확언보다 ‘더 노력하겠습니다’고 말씀 드리며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면 보호자들께서는 “그래두 맘대로 자유롭게 사시니 그게 더 좋습니다”고 이해하여 주십니다.
며칠 전, 치매 등급을 받고 요양원 입소하신 임OO어르신과 장OO어르신이 싸우셨는데 키 큰 임 어르신은 발길로 차시고
키작은 장어르신은 손 닿으시는 목덜미와 가슴을 할퀴시고, 발견 즉시 달려간 요양직원들이 두 어르신을 간신히 떼어 놓았습니다.
그럴 때의 남자 치매 노인분들은 힘이 있으십니다.
장어르신은 뺨이 벌겋고 가슴을 발로 맞아 아프다고 하시고(가슴까지 올라갈 킥은 아닙니다) 임 어르신도
목덜미와 가슴께 긁힌 상처가 나고 두 분을 떼어 놓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붙잡은 어르신 손목은 멍이 들었습니다.
임어르신이 가슴께가 아프다고 하셔서 보호자께 설명을 하고 동의하에 병원에서 촬영을 했으나 장어르신 손길에 의한 골절은 아니었습니다.
보호자께 사실 전화를 드리고 며칠 경과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저께는, 따님이 방문하여 야외 소풍을 오신 듯, 밝은집 너른 잔디정원 평상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드리고 가셨지만
별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다음날인 어제는 또 다른 따님이 방문하였는데 그간의 일을 가족에게서 전해 듣지 못하고 온 따님은 놀라고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요양팀, 간호팀이 격투기가 있었으며 다툼 그 즉시 주보호자께 알려드린 후 만일을 생각하여 병원을 다녀왔음을 설명하였으나
따님은 직원들의 학대를 염두에 두신 듯, CCTV를 돌려 볼 수 있느냐, 아는 변호사가 있는데 . .뭐 그러셨나 봅니다.
이분은 사무실에까지 내려 오셔서 저에게 “왜 분위기가 달라졌느냐, 전에는 참 따뜻하고 좋았는데 오늘은 이렇게 달라진 것 같다.
오늘은 다른 데 하고 똑 같아진 것 같다” 고 분노하셨습니다.
저는 남자 어르신들의 입소 상담에서 종종 듣는 폭력성을 크게 문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입소하셔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면 안정되시고
순해지시고 밝아지시는 경우를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다툼까지 원천 차단하려면 생활공간의 영역을 제한해야 하는데 한 두 분의 아주 가끔씩 발생되는
다툼 때문에 밝은집 가족 전부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보행이 어려우신 여자 어르신은 도너츠 방석을 자가용처럼 타시고 마음대로 다니십니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렇게 까지 격하게 싸우신 어르신들도 없었고 직원의 학대로 의심 받은 적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요양원 복도는 폭 3m 길이 62m 여서 한번 복도를 걸으시면 사철 전천후 100m 트랙을 돌으시는 셈이고 임어르신은 그 자유를 가장 많이 누리시며
하루 열 바퀴는 걸으실 뿐 아니라 넓은 거실에서 우리가 특별히 준비한 마이크를 잡고 흘러간 노래 공연을 한 시간씩 하시는 분도
사실 임어르신 입니다. 쾌청한 날은 정원에 나가 운동하시고 올해도 화단에 고추모종 한포기 심으셨습니다.
임어르신도 처음 입소시에는 자녀를 ‘남의 자식’이라고 믿고 부인께 폭력적이셔서 입소하시게 되었으며 몇 달 지나니 ‘다 나으신 것 같다’며
자녀들이 댁으로 모셔 갔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 댁에서 또다시 발병하여 재입소하시고 몇 달 지난 지금은 또다시 ‘다 나으신 것’ 같아졌습니다.
완전 개방운영을 하여 아무 때나 오셔서 다 보실 수 있게 운영하고 있고 솔직히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고 그 보람으로 사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CCTV, 아는 변호사 , ,”등의 따짐을 듣는 것이 나이를 먹으니 나도 참기 힘들었습니다.
이때껏 숨어 있던 저의 나쁜 속사람이, 잘 견뎌온 인내의 포장을 뚫고 나옵니다.
“밝은집은 81명 규모인데 제가 45명 限 모십니다. 노인사업이 아니라 노인복지를 하려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수십억 넣고 한 달에 원목 월급 100만원 받습니다. 저는 저 아래 있는 컨테이너에 살고 있습니다."
노인 학대하면서 돈 벌어 먹고 살려고 요양원하는 사람으로 보는것 같아 화가 나고
양평에서 뱅뱅돌며 월화수목금금금 지낸 날들이 허망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맘에 안 드시면, 서비스 좋은 다른 곳으로 언제라도 옮기세요. 가시면 됩니다.
우리도 이젠 나이 먹고 남자직원 있어도 남자 어르신은 힘이 딸려요 이렇게 까지 다투신 일은 처음이라
예전처럼 여자분 만 모셔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원장님과 내가 결혼한 사람도 아니고”. 저도 평시에는 하지 않던 말이 나왔습니다.
요양원 운영자는 '을'의 입장일까요? 목사는 천사같기만 해야 할까요?
보호자는 젊어도 자유발언의 권리가 있고 운영자는 잘못이 없어도 침묵해야 하나요?
따지던 임 어르신 따님은 순식간에 낯빛이 변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섭섭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알았어요, 다른 요양원에 모실께요” 휙 나가버렸습니다.
치매 어르신을 모시고 올 때의 보호자 표정은 어둡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두번째 면회오면 밝아져서 돌아 갑니다.
자꾸 안정되고 양호해지시면 그냥 저절로 그리 되는 줄 아십니다.
그리고 몇달 지나면 모시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나빠지시면 모시고 오세요" 하고 보내드립니다.
임 어르신은 가정에 복귀하셨다가 다시 오셔서 몇달 지나니 아주 치매없으신 어른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치매가 안정된 것이지
나으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요양실로 올라가 요양팀, 간호팀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친절히 했는데도 이러 저러했고 .... 저희도 억울하고 속상하고...” 직원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임어르신이 퇴소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임 어르신은 “갔다 올게” 하셨지만 저는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가능하면 넓은 곳 자유로운 곳, 실내운동 공간이 넓고 밖에 운동장이 넓은 곳으로 모시세요. 그리고 지지해드리는 것이 필수예요.
그래야 좋은 상태를 유지하셔요”
떠나신 후, 원장님이 말합니다. “저러고 가서 다시 오시지 않겠지만 오셔도 모시지 맙시다”
너무 오래 밤낮없이 밝은집 어르신들만 생각하고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묵묵히, 쉼도 모르고 내 곁을 지켜준 원장님과 초로의 한가롭고 여유롭고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원장 전도사님께 예순 다섯까지만 하자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한 그 약속, 이제는 지키려고 힘써봐야 겠습니다.
우리가 손을 뗀 후의 밝은집 미래를 문득 그려봅니다.
다른 주인이 80명 받아 복닥 복닥하게 만들면 ? 2층 올려 150명 이상의 시설로 영리를 추구하면?
지금처럼 당일 경매를 거친 신선한 먹거리, 넉넉한 식사를 드리지 않으면? 마지막 숨결에 말씀과 기도로 곁을 지켜드리는 사람이 없으면?
요양원이 아니라 경로당 같다는 밝은집이, 어두운 그늘이 지게되면? 격투기 이야기의 결국은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원장님
고백이 되었습니다.
오늘밤도 우리 요양사 선생님들은 어르신들 곁을 지키고 저희 두 사람은 위급한 상황이 오면 밤이든 새벽이든 올라가 곁을 지키겠지요.
하나님은 불켜진 방, 우리들을 보시고, 보호자분들은 편안한 잠에 들겠지요.
(2019. 5.3) 유 보현 목사
양평 내려와 노인의 가정, 가장이 된지 29년쨉니다. 40대 초반, 쨍쨍하던 때 내려와 70대 초로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모든 게 변했는데 사람들은 내게 말합니다.
“목사님은 예전 그대로시네. ”칭찬일까요? 답답함 일까요? 흉보는 걸까요?
세상과 세태가 변하고 사회도 제도도 변했는데 저는 오늘도 원장 전도사님에게서 “하여튼 . . . 여전하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양원 남자 어르신들은 서로 잘 지내시다가도 순식간에 맞붙어 싸우실 때가 있습니다.
예측이 불가하고 교육이 불가하고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금방 잊어버리시고 함께
다시 친구가 되시니 보호자들께 “일어난 일”의 경위를 전화로 설명드리지만 “다신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는
확언보다 ‘더 노력하겠습니다’고 말씀 드리며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면 보호자들께서는 “그래두 맘대로 자유롭게 사시니 그게 더 좋습니다”고 이해하여 주십니다.
며칠 전, 치매 등급을 받고 요양원 입소하신 임OO어르신과 장OO어르신이 싸우셨는데 키 큰 임 어르신은 발길로 차시고
키작은 장어르신은 손 닿으시는 목덜미와 가슴을 할퀴시고, 발견 즉시 달려간 요양직원들이 두 어르신을 간신히 떼어 놓았습니다.
그럴 때의 남자 치매 노인분들은 힘이 있으십니다.
장어르신은 뺨이 벌겋고 가슴을 발로 맞아 아프다고 하시고(가슴까지 올라갈 킥은 아닙니다) 임 어르신도
목덜미와 가슴께 긁힌 상처가 나고 두 분을 떼어 놓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붙잡은 어르신 손목은 멍이 들었습니다.
임어르신이 가슴께가 아프다고 하셔서 보호자께 설명을 하고 동의하에 병원에서 촬영을 했으나 장어르신 손길에 의한 골절은 아니었습니다.
보호자께 사실 전화를 드리고 며칠 경과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저께는, 따님이 방문하여 야외 소풍을 오신 듯, 밝은집 너른 잔디정원 평상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드리고 가셨지만
별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다음날인 어제는 또 다른 따님이 방문하였는데 그간의 일을 가족에게서 전해 듣지 못하고 온 따님은 놀라고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요양팀, 간호팀이 격투기가 있었으며 다툼 그 즉시 주보호자께 알려드린 후 만일을 생각하여 병원을 다녀왔음을 설명하였으나
따님은 직원들의 학대를 염두에 두신 듯, CCTV를 돌려 볼 수 있느냐, 아는 변호사가 있는데 . .뭐 그러셨나 봅니다.
이분은 사무실에까지 내려 오셔서 저에게 “왜 분위기가 달라졌느냐, 전에는 참 따뜻하고 좋았는데 오늘은 이렇게 달라진 것 같다.
오늘은 다른 데 하고 똑 같아진 것 같다” 고 분노하셨습니다.
저는 남자 어르신들의 입소 상담에서 종종 듣는 폭력성을 크게 문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입소하셔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면 안정되시고
순해지시고 밝아지시는 경우를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다툼까지 원천 차단하려면 생활공간의 영역을 제한해야 하는데 한 두 분의 아주 가끔씩 발생되는
다툼 때문에 밝은집 가족 전부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보행이 어려우신 여자 어르신은 도너츠 방석을 자가용처럼 타시고 마음대로 다니십니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렇게 까지 격하게 싸우신 어르신들도 없었고 직원의 학대로 의심 받은 적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요양원 복도는 폭 3m 길이 62m 여서 한번 복도를 걸으시면 사철 전천후 100m 트랙을 돌으시는 셈이고 임어르신은 그 자유를 가장 많이 누리시며
하루 열 바퀴는 걸으실 뿐 아니라 넓은 거실에서 우리가 특별히 준비한 마이크를 잡고 흘러간 노래 공연을 한 시간씩 하시는 분도
사실 임어르신 입니다. 쾌청한 날은 정원에 나가 운동하시고 올해도 화단에 고추모종 한포기 심으셨습니다.
임어르신도 처음 입소시에는 자녀를 ‘남의 자식’이라고 믿고 부인께 폭력적이셔서 입소하시게 되었으며 몇 달 지나니 ‘다 나으신 것 같다’며
자녀들이 댁으로 모셔 갔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 댁에서 또다시 발병하여 재입소하시고 몇 달 지난 지금은 또다시 ‘다 나으신 것’ 같아졌습니다.
완전 개방운영을 하여 아무 때나 오셔서 다 보실 수 있게 운영하고 있고 솔직히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고 그 보람으로 사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CCTV, 아는 변호사 , ,”등의 따짐을 듣는 것이 나이를 먹으니 나도 참기 힘들었습니다.
이때껏 숨어 있던 저의 나쁜 속사람이, 잘 견뎌온 인내의 포장을 뚫고 나옵니다.
“밝은집은 81명 규모인데 제가 45명 限 모십니다. 노인사업이 아니라 노인복지를 하려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수십억 넣고 한 달에 원목 월급 100만원 받습니다. 저는 저 아래 있는 컨테이너에 살고 있습니다."
노인 학대하면서 돈 벌어 먹고 살려고 요양원하는 사람으로 보는것 같아 화가 나고
양평에서 뱅뱅돌며 월화수목금금금 지낸 날들이 허망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맘에 안 드시면, 서비스 좋은 다른 곳으로 언제라도 옮기세요. 가시면 됩니다.
우리도 이젠 나이 먹고 남자직원 있어도 남자 어르신은 힘이 딸려요 이렇게 까지 다투신 일은 처음이라
예전처럼 여자분 만 모셔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원장님과 내가 결혼한 사람도 아니고”. 저도 평시에는 하지 않던 말이 나왔습니다.
요양원 운영자는 '을'의 입장일까요? 목사는 천사같기만 해야 할까요?
보호자는 젊어도 자유발언의 권리가 있고 운영자는 잘못이 없어도 침묵해야 하나요?
따지던 임 어르신 따님은 순식간에 낯빛이 변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섭섭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알았어요, 다른 요양원에 모실께요” 휙 나가버렸습니다.
치매 어르신을 모시고 올 때의 보호자 표정은 어둡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두번째 면회오면 밝아져서 돌아 갑니다.
자꾸 안정되고 양호해지시면 그냥 저절로 그리 되는 줄 아십니다.
그리고 몇달 지나면 모시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나빠지시면 모시고 오세요" 하고 보내드립니다.
임 어르신은 가정에 복귀하셨다가 다시 오셔서 몇달 지나니 아주 치매없으신 어른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치매가 안정된 것이지
나으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요양실로 올라가 요양팀, 간호팀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친절히 했는데도 이러 저러했고 .... 저희도 억울하고 속상하고...” 직원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임어르신이 퇴소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임 어르신은 “갔다 올게” 하셨지만 저는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가능하면 넓은 곳 자유로운 곳, 실내운동 공간이 넓고 밖에 운동장이 넓은 곳으로 모시세요. 그리고 지지해드리는 것이 필수예요.
그래야 좋은 상태를 유지하셔요”
떠나신 후, 원장님이 말합니다. “저러고 가서 다시 오시지 않겠지만 오셔도 모시지 맙시다”
너무 오래 밤낮없이 밝은집 어르신들만 생각하고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묵묵히, 쉼도 모르고 내 곁을 지켜준 원장님과 초로의 한가롭고 여유롭고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원장 전도사님께 예순 다섯까지만 하자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한 그 약속, 이제는 지키려고 힘써봐야 겠습니다.
우리가 손을 뗀 후의 밝은집 미래를 문득 그려봅니다.
다른 주인이 80명 받아 복닥 복닥하게 만들면 ? 2층 올려 150명 이상의 시설로 영리를 추구하면?
지금처럼 당일 경매를 거친 신선한 먹거리, 넉넉한 식사를 드리지 않으면? 마지막 숨결에 말씀과 기도로 곁을 지켜드리는 사람이 없으면?
요양원이 아니라 경로당 같다는 밝은집이, 어두운 그늘이 지게되면? 격투기 이야기의 결국은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원장님
고백이 되었습니다.
오늘밤도 우리 요양사 선생님들은 어르신들 곁을 지키고 저희 두 사람은 위급한 상황이 오면 밤이든 새벽이든 올라가 곁을 지키겠지요.
하나님은 불켜진 방, 우리들을 보시고, 보호자분들은 편안한 잠에 들겠지요.